찬 바람이 코끝을 스치는 계절이 오면, 금강 대청호 상류의 고요한 수면 위로 반가운 손님들이 찾아온다. 여느 오리들처럼 무심히 지나칠 법한 작은 무리. 하지만 눈을 크게 뜨고 망원경을 들이대면 수면 위를 유영하는 그들의 옆구리에서 영롱한 먹색의 '용 비늘무늬'가 선명하게 빛난다. 전 세계에 단 수천 마리밖에 남지 않은 지구적 멸종위기종이자, 우리에겐 천연기념물 제448호로 지정된 귀한 몸, 바로 ‘호사비오리(Scaly-sided Merganser)’다.
멸종위기 야생동물 1급, 천연기념물 제448호
올해 대청호 상류에서 이들의 서막이 열린 것은 10월 15일이었다. 번식지인 러시아 연해주나 중국 동북부의 깊은 산간 계곡을 떠나 수천 킬로미터의 고단한 비행 끝에 첫 선발대인 3마리가 대청호에 무사히 닻을 내린 것이다.
더욱 고무적인 것은 첫 발견 이후 시간이 흐를수록 이곳을 찾는 호사비오리의 행렬이 이어지며 최근에는 개체수가 늘어났다는 점이다. 선발대가 안전과 먹이 환경을 확인하자 후발대 무리가 차례로 합류하며 대청호 상류 유역을 번듯한 겨울 보금자리로 삼고 있다는 생태적 증거다.
특히 오늘 현장에서 마주한 호사비오리들은 한곳에 뭉쳐 있는 대신 대청호가 내어준 넓은 품을 나누어 쓰듯 여러 무리로 분산되어 있었다. 예민한 호사비오리들이 좁은 여울에서 서로 사냥을 방해하지 않도록 먹이 경쟁을 피하고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해 스스로 리스크를 분산시키는 영리한 생존 지혜를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호사비오리, 금강 대청호에서 안정적 월동
대청호 유역은 이미 1990년대 후반 한 쌍의 월동 기록이 남겨진 이래 최근까지도 간간이 귀한 모습을 드러내며 생태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어온 유서 깊은 곳이다. 호사비오리는 조류 세계에서도 손에 꼽히는 ‘까다로운 심미안’을 가졌다. 물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투명한 1급수여야 하고, 먹이인 작은 물고기를 사냥하기 적당한 여울이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 인간의 인기척이나 소음이 없는 완벽한 정적이 보장되어야만 비로소 자리를 잡는다. 10월 중순부터 시작해 두 자릿수로 늘어난 호사비오리의 행렬은 이곳의 모래톱과 하중도가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으며, 우리 강산이 이들을 품어줄 만큼 건강하다는 것을 온몸으로 증명하는 청신호와 같다.
‘호사(豪奢)’라는 그 화려한 이름 뒤에는 인류가 함께 짊어져야 할 무거운 책임이 숨어 있다. 무분별한 하천 개발과 서식지 파괴로 이들의 보금자리와 전 세계 개체수는 매년 줄어들고 있다.
실제로 현장에서 만난 호사비오리 무리는 수면 위를 세차게 박차고 날아오르며 하얀 물보라를 일으키는 경이로운 생명력을 뿜어내다가도 작은 인기척에 민감하게 반응하곤 했다. 멀리서 찾아와 대청호의 겨울을 풍성하게 채워주고 있는 이 귀한 손님들이 스트레스를 받지 않도록, 우리는 조용히 거리를 두고 지켜봐 주는 성숙한 시선이 필요하다.
겨울 햇살을 받아 은빛으로 부서지는 대청호의 물결 위로, 호사비오리의 비늘무늬가 오래도록 안전하게 물들 수 있기를 바란다. 이 경이로운 생명의 발걸음이 내년에도, 그다음 해에도 계속 이어지는 한, 우리의 금강은 여전히 푸르고 건강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