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자 박홍원 이괄난 때 18세 의병장 무악재전투 큰공
옥천군수 박춘무 의병장 아들 박동명(朴東命, 1575~1636년)은 조선의 무신이다. 본관은 순천 박씨(順天朴氏), 자 시응(時應), 호 매은당(梅隱堂), 시호 충경(忠景)이다. 임진란 때 선봉장으로 공을 세웠다. 병자호란 때도 의병을 일으켜 청주서 북진해 안성 죽주산성을 거쳐 남한산성이 있는 경기도 광주 땅에 진군했다.
이득남 옥천의병장 성남 험천진서 전사
충청감사 정세규는 12월 18일 근왕 명령에 받았을 때 벌써 남한산성은 포위되었다. 정 감사보다 박동명 청주 의병진이 먼저 도착해 광주 남한산성 인근 무계전투에서 청군과 치열한 전투 중에 전사했다.
그러나 충청감사 정세규가 이끄는 충청 근왕병은 다음해인 1월 2일에 남한산성 남방 성남분당 험천에 도착했다. 판교 청군이 공격하자 안성 죽산산성에 있던 충청병사 이의배 선봉장은 곧 도망쳤고 정세규는 절반의 군사를 잃었다. 그러나 이득남 의병장이 이끄는 1천 명 옥천의병은 성남 험천진전투에서 화살이 다할 때까지 싸우다 이득남 의병장이 전사했다.
박동명 의병장 무계전투 장렬히 전사
박동명 의병장 휘하의 김득성 편장은 일단 물러나 청군의 공세를 피해 후일을 도모하자고 말렸으나 박동명 의병장은 ‘이곳이 사나이가 죽을 곳이다’ 소리치며 물러서지 않고 싸우다 전사해서 시신조차 수습하지 못하고 타던 말만 찾았다. 무계전투가 끝난 후 박동명 의병장의 시신은 찾지 못해 의관만으로 초혼장을 치뤘다.
박홍원(朴弘遠)은 박춘무 의병장의 손자이며 매은당 박동명 의병장의 맏아들로 1605년(선조 38년)에 청주에서 출생하였고 어머니는 완산 이씨(完山李氏)이다.
이괄 난 아들 박홍원 큰공 세워
그는 1624년 불과 18세에 병석에 계신 아버지 박동명이 박홍원에게 대신 나가 「이괄 반란군」을 토벌하라는 부친의 말에 박홍원은 청주에서 수천 명의 의병을 모아 밤낮으로 쉬지 않고 말을 몰아 장만(張晩) 도원수 토벌군과 합류한다. 토벌군은 1624년 2월 한양 북쪽 길마재(무악재) 전투에서 ‘이괄 반란군’을 토벌 진압하며 큰 공을 세웠다. 부친의 병환이 걱정되어 즉시 고향 청주로 돌아온다.
아들 박홍원 의병장이 집에 돌아오자 아버지 박동명은 그의 손을 잡고 “네 한 몸이 충효이니 너는 참으로 충성스럽고 효성스런 아들이다”라고 자탄하고 그로 인해 병도 치유되었다 한다. 박홍원 의병장은 1631년 1월에 진무원종공신 1등으로 선무랑에 제수되었고 아버지 박동명도 가선대부 공조참판에 증직되는 가문에 영광을 안겼다.
부친 박동명 전사후 박홍원 두문불출
그 후 박홍원이 30세 때인 1636년 12월에 병자호란이 터져 아버지 박동명 의병장은 청주에서 의병을 모아서 근왕을 위해 남한산성을 북진한다. 남한산성 주변부 무계에서 청군과 치열한 전투 끝에 박동명 의병장은 전사한다. 이때 아들 박홍원은 어머니 병 수발 때문에 아버지 박동명을 따라가지 못했다. 그는 전사한 아버지 시신도 찾지 못한 불효자라며 두문분출하며 살았다. 박홍원 의병장은 1669년(현종 10년) 2월에 65세 일기로 여생을 마쳤다.
임진왜란 때부터, 이괄의난, 병자호란까지 3대에 걸친 의병장을 배출한 정주지방 순천 박씨(順天朴氏) 가문의 박춘무 의병장, 아들 박동명 의병장, 박홍원 의병장까지 국난에 처할 때마다 나라를 구하기 위해 의병을 일으킨 만고충신 박춘무 명문가를 4회에 걸쳐 행장을 살펴보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