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를 알고 가난한 자 구제한 의인 ‘오상규’
상태바
예를 알고 가난한 자 구제한 의인 ‘오상규’
  • 도복희기자
  • 승인 2018.12.13 15:1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북흥학회·서북학회 창립…애국계몽운동
국권회복 위해 옥천서 독립운동가 후원
옥천읍 구읍 소재 괴정 오상규 선생 생가(오른쪽 건물)

△ 애국계몽운동가 오상규 선생
괴정 오상규 선생은 대한제국의 시종원 부경을 지낸 후 일제에 의해 1905년 을사늑약으로 실질적인 국권을 상실하자, 국권회복과 애국계몽운동에 나서 한북흥학회와 서북학회를 창립하며 애국계몽운동을 적극적으로 펼친 옥천의 인물이다. 그는 중앙 관직생활을 마치고 1910년 경술국치를 전후하여 일제와 조선총독부에서 온갖 회유를 뿌리치고 서울 종로구 서린동에서 생면부지인 충청도 두메산골인 옥천읍 구읍으로 이사하였다. 1917년 옥천에 발생한 대수해나 가뭄 때 거금의 성금을 내 떠내려간 제방 등을 수축하였고, 가난한 사람들을 적극 구제하는 등 평소 옥천 지방에 많은 적덕을 쌓았다. 오상규 선생은 1922년 생을 마감하기까지 대한제국 시대 애국계몽운동가이자 선각자였다.

▲ 괴정 오상규 선생

△ 생애
오상규 선생은 두만강 강변의 국경도시인 함경북도 회령의 명문가인 해주 오씨 자손이다. 대대로 벼슬길에 오른 사대부 집안으로 그는 조선 후기인 1858년(철종 9)에 태어났다. 호는 회화나무가 있는 회령 고향 서동 마을의 이름에서 따 괴정이라 지었고, 자는 경노이며 본관은 해주다. 오상규 선생은 파평 윤 씨와의 사이에서 2남 1녀를 두었고 장남 중묵은 대한제국 정3품의 비서감 승을 지냈고, 차남 윤묵, 사위 이윤재를 두었다.

▲ 오상규 선생 옥천 구룡리 신도비

△ 관직생활
괴정 오상규는 조선말엽 조대비의 친정 조카인 병조판서 조영하의 천거로 1879년(고종16) 무관직인 종6품인 선진관에 발탁돼서 처음 무신으로 관직에 진출하였다. 이후 1898년(광무 2) 12월에 정3품인 철도국장에 임용되었다. 이어서 1899년(광무 3) 3월에는 농상공부 주사 주임관 3등에 승진하였다. 1900년(광무 4) 2월에는 농상공무 참서관에서 철도국장인 주임관 3등에 임명된다. 또 한달 후인 1900년 3월 철도국장으로 중추원 1등 의관에 임용되었고, 칙임관 4등에 승진하여 1900년 5월까지 대한제국의 경인선 철도 부설 및 운행과 경부선, 경의선, 경원선 부설 계획과 추진까지 큰 공적을 남겼다. 1910년(고종 42) 경술국치의 한일합병이 되며 나라를 잃자, 벼슬을 버리고 옥천의 구읍으로 이사와 65세 일기로 생을 마쳤다.

▲ 한국철도의 선구자, 대한제국 오상규 철도국장

△ 애국 계몽운동(한북흉학회와 서북학회 활동)
1905년 강화군수를 끝으로 관직에서 물러난 오상규 선생은 을사늑약으로 자주권을 상실한 대한제국의 국권회복을 위한 실력양성을 목적으로 한 애국계몽운동으로 학교설립운동과 국민계몽운동을 적극 펼치게 된다. 1907년 3월부터 오상규와 이동휘 등은 지회설립을 독려함과 동시에 함경도 각 지역을 순회하며 신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학교설립을 촉구했다. 한북흥학회와 서북학회는 함께 청년활동을 전개할 것을 결의하고, 학리토론, 지식교환, 국권회복의 취지로 서북학생친목회를 만들어 지도자 양성에 주력했다. 또한 서북학회는 의병장 최익현이 순국하자 의금모금운동을 전개했고, 재정지원자인 이용익 군부대신의 죽음이나 헤이그 밀사 이준익 분사에 대해서도 운동대책을 협의하는 등 현실적인 민족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오상규 선생은 안창호, 이동휘, 이갑, 이종호 서북학회 동지들이 중국과 연해주로 망명하는 뒷바라지를 회장으로서 다하고, 국권회복을 위한 구한말의 애국계몽운동에서 큰 발자취를 남겼다.

▲ 대한제국 철도국장 임명, 1900년 고종황제의 칙명

△ 괴정집
이 책은 오상규 선생이 작고한지 23년 된 해인 1944년 그의 둘째 아들 윤묵이 유고를 모아 편집하고, 친구인 김유성과 전 참서관 조태옥이 서문을 얻어 간행했다. 1권 맨 앞에는 오언절구의 시가 실려 있는데 큰 아들 중묵이 함흥 임소로 가는데 문명의 이기인 기차를 타고 감에 왕래는 걱정할 것 없음을 말하여 새로운 세상이 열렸음을 알림과 동시에 아들을 그리워하는 정을 노래하고 있다. 이 외에도 공화정치의 필요성을 주장하거나 여성의 교육 기회 제공과 필요성을 강조하거나, 파렴치한 그 당시 지식인과 거짓 선비, 지사를 비난하기도 했다. 신교육 확대 필요성을 강조했고, 부정부패한 고급 관료는 사심을 버려야 함을 일갈하기도 했다.

△ 옥천으로의 낙향
1910년 한일합병으로 일제에 의해 강제로 나라를 빼앗기자, 대한제국의 고위 관료이며 민족의 선각자로서 통탄을 금치 못한 오상규는 서울에서 두메산골인 옥천으로 이사하여 낙향하였다. 그는 옥천 구읍에 살면서 저술에 매진하며 주민들이 어려운 일을 겪을 때마다 많은 후원금을 내어 주민들을 구제하는데 힘을 쏟았다. 염전 사업으로 부를 이룬 그는 국권회복과 실력양성을 위해 학회 활동을 통해 구국교육 사업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옥천에 이사 와서 학교 설립에 부지를 희사하였고 옥천에 큰 수해가 날 때마다 거금을 희사하여 하천 뚝방을 다시 쌓게 하였고 수재민을 구휼하였다.

△ 의로운 삶
경현당 산기슭 오상규 선생묘소가 있는 옥천군 구룡리 신도비에는 “예를 갖추어 선비에게 자신을 낮추고, 논밭을 마련하여 가난한 자를 구제하였으니, 전문 식객들이 제각기 자신과 친하다고 생각함과 같고 범공의 무리들이 의가 시행됨을 고루 입은 것과 같네”라고 친구이며 대한제국 참서관이었던 김유성 선생이 찬양하였다.

▲ 집필 전순표 향토사학자

△ 전순표 향토사학자의 집필 취지
옥천의 역사인물 중 오상규 선생에 대해 집필한 전순표 향토사학자는 “일제강점기를 거치는 동안 일본은 우리 역사를 왜곡하고 축소해 왔다. 옥천의 1700년대 역사 역시 이러한 불운을 피해갈 순 없었다. 역사의 단절은 우리의 맥을 끊는 거나 마찬가지다. 이러한 일환에서 25년 전부터 역사의 인물발굴에 매진해 왔다. 특히 옥천을 근거지로 두고 있던 수많은 인물에 많은 관심을 갖게 됐다. 오상규 선생 역시 근현대사 역사인물 발굴 과정에서 알게 된 분이다.

그는 조선말기 관직에 나가 대한제국시대 철도국장이라는 중책을 맡아 경인선을 건설하는데 선구자 역할을 했다. 이뿐 아니라 국민을 계몽하기 위해 사립학교를 설립 민중 계몽 운동에 앞장선 인물이다. 서북학교의 회장을 역임하면서 이준 열사나 도산 안창호, 상해임시정부 이동휘, 박은식 선생 등 독립운동가에 대해 재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은 숨은 공로가 있다.

그는 1910년 경술국치가 된 후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옥천으로 내려와 많은 사람들을 가난으로부터 구제하고 옥천의 재난 시 자발적 후원을 하는데 망설임 없이 적덕을 쌓아 옥천인으로부터 존경을 받아왔다”고 말했다.

이어 “독립운동가에게 재정적 후원을 한 사람에 대해서는 간과하는 경우가 많은데 조직을 움직이려면 재정적 지원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고 이러한 숨은 공로를 인정해 줘야한다는 생각”에서 6년 전 소논문을 통해 오상규 선생에 알게 되어 집필하게 되었다고 취지를 밝혔다.

또한 오상규선생의 증손자 오근호(한양대 공대 초대대학원장) 교수를 2년 전 알게 돼 지난 4월 서울에서 애국계몽운동가 ‘오상규 선생 창립기념사업회’에 참석할 수 있었다고 기쁨을 전했다. 전 향토사학자는 “옥천의 역사인물을 찾는 것은 누군가 반드시 해야 할 의미”라며 “이것이 곧 옥천의 자긍심이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