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호>김영미시인의 정지용시 다시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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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호>김영미시인의 정지용시 다시 읽기
  • 옥천향수신문
  • 승인 2016.03.03 1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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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미 시인

파충류동물

시커먼 연기와 불을 뱉으며
소리지르며 달아나는
괴상하고 거 _ 창한 파충류 동물.

그년에게
내 동정의 결혼반지를 찾으러 갔더니만
그 큰 궁둥이로 떼밀어

··· 털 크 덕 ··· 털 크 덕 ···

나는 나는 슬퍼서 슬퍼서
심장이 되구요

옆에 앉은 소러시아 눈알 푸른 시약시
「당신은 지금 어드메로 가십나?」

··· 털 크 덕 ··· 털 크 덕 ··· 털 크 덕 ···

그는 슬퍼서 슬퍼서
담낭이 되구요

저 기 _ 다란 짱골라는 대장(大腸).
뒤처졌는 왜놈은 소장(小腸)
「이이! 저 다리 털 좀 보아!」

털 크 덕 ··· 털 크 덕 ··· 털 크 덕 ··· 털 크 덕 ···

유월달 백금 태양 내려쪼이는 밑에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소화기관의 망상이여!

자토 잡초 백골을 짓밟으며
둘둘둘둘둘둘 달아나는
굉장하게 기 _ 다란 파충류 동물

바나나 한 쪽 떼어들고
가만히 생각하노니

「내가 가는 길도
이 바나나와 같구나」

아아 산을 돌아
몇만 리 물을 건너
남쪽나라 바나나가

이 땅에 있는 사람들의 입에 씹히네.

씹히네.
몇천 리 물을 건너
데굴데굴 굴러 온 몸이
밤으로면 자근자근 시름이 씹히네.

바나나 한 쪽 떼어들고 오늘밤에도
몇만 리 남쪽 땅
바나나 열릴 나무를 생각하면서
흐릿한 불빛 아래 내 몸이 누웠네.

* 파충류동물 : 여기서 ‘파충류동물’은 기차를 비유적으로 표현한 말.
* 짱골라 : 중국인을 지칭하는 속어.
* 자토(􀀀土) : 산화철이 많이 들어 있는 붉은빛을 띠는 흙으로 산수화나 도자기를 만들 때에 많이 쓰임.

■ 작품 해설
이 시는 기차 여행을 하면서 마음에 품은 생각을 그려 놓고 있다. ‘기차’는 먼저 낯설고 기괴한 생김새 때문에 ‘뱀’ 같은 ‘파충류동물’에 비유되다가 ‘길다’라는 특성으로 ‘바나나’로 연상되는 이미지를 빚어내고 있다.
기차를 타고 가는 극동의 네 나라 사람들을 나와의 감정적인 반응과 연결시키며, 기괴한 기차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을 비롯한 승객들마저도 모두 낯설고 괴상한 존재로 느끼고 있다.
결국 괴물같이 거대한 기차는 존재의 의미를 모두 삼켜버리고 달리기만 하는 부정적 이미지로 묘사되어 자의식에 방황하던 자신에게 부조리한 현실을 절실히 실감하게 하는 대상이 되기도, ‘기차’를 타고 어디론가 가고 싶었던 자신을 낯설고 괴상한 존재 앞에 노출시키며 무기력한 자신을 또 다시 발견하게 만드는 대상이 되기도 한다.
정지용의 초기시 몇 편은 행, 연의 배치와 글자 크기 조절, 부호 사용 등의 다양한 시각적 효과를 통해서 작품의 낯설음을 유발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아마도 일본 유학초기 근대적 풍물을 직접 체험하고 이를 통해 병든 시대와 자신의 처지를 연루시키고자 한 것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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