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민관 정립 선생의 국가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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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민관 정립 선생의 국가사랑
  • 전순표 시인·옥천향토전시관 명예관장
  • 승인 2019.11.14 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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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순표 시인·옥천향토전시관 명예관장

고암 정립(鄭雴) 선생은 각고의 학업 끝에 62세에 대과에 급제한 문신으로 학문과 덕행을 쌓고 강직한 숭현 의식과 청렴한 목민관으로 후세를 사는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는 조선중기인 1554년(명종 9년)에 충청북도 옥천군 동이면 적하리 용죽 마을에서 태어나서 1640년(인조 18년)까지 조선 중기까지 87세의 생애를 살았다.
특히 그는 조선 인조 때 문신으로 임진왜란과 정묘호란의 민족 수난기에 의병으로 활약한 성리학자로 나라를 지키고 충의를 실천한 참된 목민관으로 옥천이 배출한 훌륭한 인물이다.
 일찍이 출중한 수재로 그는 11세인 1564년(명종 19년) 3월에 충청도 청산현 동당시(東堂試)에 응시하여 <왕통 태평십이책론>을 지어 합격하며 주위를 놀라게 했다.

▲불굴의 의지로 62세 대과 급제
그는 1615년(광해군 7년) 노년인 62세에 과거에 급제, 80세에 이르기까지 국방부 군수국장 격인 군자감정 등을 지낸 관리로서 위정자가 갖추어야할 수기치인(修己治人)의 유교적 가치를 닦고 실천한 청렴한 공직자의 표상이다.
정립 선생의 충의정신은 국가가 누란의 위기에 처할 때마다, 어김없이 발휘되어 임진왜란 때 의병장 조헌과 이충범 선생 휘하에서 의병 참모로 활약했다. 그리고 30여년 후인 1627년 1월 후금군은 아민에게 3만 명의 병력을 주어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의주, 평양을 거쳐 황주로 파죽지세로 진격해 왔다. 그 때 정립은 김장생 의병장 휘하에서 도유사와 소모관으로 의병에 참가하여 활약했다. 그 외에도 정묘호란 때 동궁인 소현 세자를 호위하며 전주까지 호종했다.
그는 강건한 의지를 관철해 잦은 전란과 가사 일에도 불구하고 학업을 포기하지 않고 62세에 대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학유로 처음 관직에 나가 중앙과 지방에 여러 관직을 맡아 청백한 실천으로 요즘의 국방차관보 격인 군수물자를 관리하는 군자감정과 판사에 까지 올랐다. 관직에 나가서도 오직 청렴함과 올곧은 자세로 진해 현감에 부임해서는 임진왜란 후 전쟁복구사업과 백성 사랑을 몸소 실천한 청백한 목민관으로 애민정신을 발휘했다.

▲낙향 후 백성 민원해결에 헌신
79세에 판사직을 끝으로 관직에서 은퇴한 그는 옥천 동이면 적하리 용죽 고향에 낙향, 삼락재에서 후학들을 가르치고 ‘삼계서원 위전 찾기’ 등과 옥천 출신 사육신 김문기, 남수문, 전팽령, 곽은, 조헌 선생 등 유림들의 숭현 사업에도 앞장선다. 그리고 옥천 백성들의 과도한 토지세의 과세 탕감과 각종 어려운 민원을 해결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와 함께 정립 선생은 옥천지방 선비를 천거하여 벼슬길을 열어 주었고, 충신, 효자, 열녀를 조정에 추천하여 정려, 표창하도록 관찰사, 군수, 어사, 관련 조정 부서 등에게 친히 서신을 보내 해결해 주었다.

▲청백한 목민관 후세에 귀감
그는 임진왜란과 정묘, 병자호란 기에 국가가 누란의 위기에 처할 때마다 주저함 없이 충의와 보국에 몸을 던진 훌륭한 유학자였고 관직에 나가서는 청백한 목민관으로서 올곧은 옥천인으로서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큰 귀감이 된다.
『고암선생유고』는 정립 선생이 생전에 남긴 일기와 메모한 연보, 그리고 사(詞), 부(賦), 잡저 등의 기록을 모아 1936년에 정상필 후손이 발행한 3권 6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이 유고집은 임진왜란과 정묘호란 당시의 충청지역의 의병전투사와 사회상을 알 수 있고 사료적 가치가 매우 높아서 2017년 충북도립대학 김종구 교수에 의해 번역본이 출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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