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의 더께가 더해가도 지워지지 않는 향기(4)
상태바
세월의 더께가 더해가도 지워지지 않는 향기(4)
  • 배정옥 수필가
  • 승인 2019.04.18 16:1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산성편
배정옥 수필가

수많은 조선 장군과 군사들은 청군이 무서워서 산성 밖으로 나가려 하지 않았다. 결국 노비인 대장장이 서흔남만이 나섰다. 그는 임금의 밀지를 받아 부인과 딸에게 주었다. 또한, 부인과 딸에게 밤 세워 그 밀지를 찢어서 옷 속에 넣고 꿰매게 한다. 그리고 그 옷을 입고 스스로 청군의 눈을 속이게 하려고 미친 거지 행색을 했다. 더부룩하고 헝클어진 머리에 침을 질질 흘렸다. 그를 청군들은 전쟁 때문에 실성했다고 생각하고 자신들 진영 밖으로 쫓아냈다. 그러자 그는 몸을 바로 하고는 밀지를 삼남(충청, 전라, 경상)으로 내려가 남한산성의 위급함을 알렸다. 서흔남은 도원수 김자점과 전라감사 이시방을 만났다.

근왕병을 거느리고 남한산성으로 오겠다는 장계를 받아 다시 남한산성으로 돌아와 인조에게 바쳤다. 이 일로 추위와 굶주림에 지쳐가던 백성들과 군사들에게 희망을 주웠다. 항전은 계속 지속 될 수 있었다. 인조는 삼전도의 치욕을 거친 뒤 고마움의 표시로 성과 이름, 그리고 중추부사의 벼슬을 내렸다. 이 사람이 바로 서흔남이다. 비록 천민인 노비이지만, 서흔남 같은 진정성 있는 민초들이 있었기에 오늘날까지 우리나라가 수많은 외세 침략에도 나라를 유지하고 발전시킬 수 있었다.

서흔남의 묘비는 초라하지만, 향토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낮은 곳에서 참되게 살고자 하는 이들의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아 주는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2014년 6월에 남한산성이 세계문화유산으로 확정되었다. 우리나라 11번째 세계문화유산이 되었다. 남한산성은 세계에서 유일한 ‘산성 도시’와 ‘임시수도’라는 특별함을 인정받았다. 이와 같은 특별함도 의미 있지만, 더욱 가치 있는 것은 나라를 지키고자 하는 백성들의 진정성이다. 이제 우리는 좀 더 진심 어린 애국심을 널리 알리고 남한산성이 더 이상 수치스런 곳이 아니라 세계인에게 감동을 주는 문화유산으로 거듭나길 바래본다.

남한산성은 해발 580m가 넘는 험준한 자연지형을 따라 둘레 11Km가 넘는 성벽을 구축하고 있으며 면적은 2.12Km²이다. 남한산성의 본성은 인조 2년 (1624)에 통일신라 시대의 주장성의 성돌을 기초로 쌓기 시작하여 2년 뒤에 둘레 6.297보, 여장 1.897개, 옹성 3개, 문 4개, 암문 16개, 우물 80개, 샘 45개 등을 만들었다. 외성은 병자호란 이후 쌓여진 것으로 본성과 시차를 두고 구축됨으로써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각 시기별 성을 쌓는 기법을 특징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다. 이외에도 남한산성 내에는 200여 개의 문화재가 산재해 있어 자연생태 환경과 더불어 산성 내 구석구석이 역사와 성화가 깃들어 있었다.

일행은 지수당을 뒤로하고 속보로 걸음을 재촉했다. 남한산성 둘레길은 총 5코스가 있다. 그 중 1코스를 선택했었던 것 같다. 오전에 이미 행궁을 강행군을 해서인지 다리는 천근만근이다. 무겁고 땅바닥에서 놓아주질 않는 것인지, 다리가 안 떨어지는 것인지, 땅이 다리를 꽉 붙잡고 놓아 주질 않는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일행들 뒤를 따라갔다. 교수님은 연세가 있는 데도 보이질 않았다. 한참을 오르니 산성의 북문이 다가섰다. 북문 밖으로 나가 보니 시원한 바람과 함께 성남시가 한눈에 들어왔다.

교수님의 설명과 함께 성곽을 따라 오솔길로 오르기 시작했다. 성곽의 탐방로 곳곳에 숨어 있는 이야기를 꺼내 곱씹으며 구간의 부드럽고 아름다운 곡선을 따라 걸었다. 산책로는 휘어지다 나무계단이 이어지는가 하면 어느새 돌이 울퉁불퉁한 길로 변하기도 했다. 좁은 길이 이어지다 탁 트인 길이 나타나는 등 다양한 분위기의 길을 한참을 걸었다. 걷다 보니 서문은 공사 중이었다. 일행들은 잠시 여정을 내려놓고 쉬며 교수님의 설명을 들었다. 벌봉에서 청나라가 총을 쏘아댔다.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한 인조는 항복의 문서를 쓰면, 충신 김상헌이 찢고, 또 찢었지만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최명길 부인과 딸이 밤새워 지은 죄수복을 인조는 입을 수밖에 없었다. 항복을 하기 위해 군룡포를 벗고 이곳 서문에서 항복을 하였다. (현재 롯데호텔 뒤 석촌 호수 가운데가 인조가 항복하던 곳) 그때 1월이었다.   

다음호에 계속…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