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의 국채보상운동(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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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의 국채보상운동(1)
  • 전순표 시인·옥천향토전시관 명예관장
  • 승인 2019.02.14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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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순표 시인·옥천향토전시관 명예관장

일본 외채 갚기 ‘국채보상운동’ 1907년 1월 국권회복운동 시작
설 명절 전인 1월 29일은 112년 전인 1907년(융희 1년)에 시작된 ‘국채보상운동’을 시작한 날이며 일본 정부와 은행에 진 외채를 모금으로 갚자는 민족자강운동이다. ‘국채보상운동’은 3.1운동과 함께 거족적으로 일어난 국권회복운동이었다.
강제 체결된 1905년 을사늑약 후, 통감부의 식민 지배야욕에 맞서 우리 선각자들은 조선민중을 일깨우고 국권회복과 교육 계몽운동 일환으로 기호흥학회, 함북학회 등이 창립되며 전국으로 사립학교설립운동이 활발히 전개된다.
이어 1907년에 일본 외채를 모금해서 갚아 ‘대한독립’을 독립하자는 ‘국채보상운동’이 불같이 일어났다. 3월부터 옥천도 이에 호응, 많은 수의 마을과 주민이 참가한다.
서울에 추진 통합기구로 이준 열사가 의장, 양기탁 선생이 총무로 ‘국채보상연합회의소’ 등이 대한매일신문사에 사무소를 내고 국채보상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한다.
이준(李寯) 열사는 1910년 경술국치 직후 옥천구읍에 낙향한 애국계몽운동가 괴정 오상규 (吳相奎) 선생과 함께 1905년부터 한북학회와 서북학회 회장을 하며 북한 지방의 통합된  학교설립운동을 주도한 선각자이다.
1907년(정미년)년 1월 29일 국채보상운동 시작으로 2월 22일 국채보상회가 조직되었다. 특히 대구에서 광문사를 경영하던 김광제, 서상돈 선생 등이 ≪대한매일신보≫에 “2천만 민중이 3개월만 금연을 하고 그 대금으로 매달 20전씩 거두면, 3달 만에 1,300만 엔의 일본에게 빚진 차관을 갚을 수 있다”는 ‘국채보상운동 취지서’를 발표하면서 이 운동은 순식간에 활화산처럼 전국에 큰 호응을 얻으며 방방곡곡에 퍼져 나갔다.

3월 3일 옥천군민 ‘국채보상회’ 처음 충북에서 결의
이에 충청북도에서는 옥천군민이 3월 3일 ‘옥천군 국채보상단연의무회’를 처음으로 ‘국채보상운동’결의를 하였다. 4월에 들어서 이규연, 정덕용 등이 옥천읍내 해창호(海昌號) 상점에서 국채보상 모금을 위한 옥천군 사무소를 열었다.
이 당시 충북 도내 부인들은 진천에서 ‘국채보상회’의 발기하고 여성들도 동참하여 일본에 진 정부 외채를 갚기 위해 나섰다.
옥천군민들은 담배와 술을 끊고 부녀자들은 패물을 팔아 이 운동에 참가한다. 일본 통감부는 조선 지배에 드는 사업 비용을 일본정부와 은행서 빌리고 조선 정부에 떠넘겼다. 이 때문에 대한제국 빚은 1906년에 1,300만 엔, 1907년 6월에 1,840만 엔으로 급격히 늘어났다. 

의병 옥천 일본군 습격 2명 살해, 가산사 인근 일본수비대와 교전
-1907년부터 정미의병, 전국에서 격렬한 항일전 전개

한편 이 해에 충북에서는 1월 노응규 의병장이 황간에서 의병 일으키고, 8월 의병 60명이 옥천 일본군 습격하여 2명 살해했고 또 속리산에서 김운로 의병장이 활약하고 제천의 이강년 의병부대가 제천에 무혈입성, 민긍호 의병장이 제천의병 8백 명이 충주 일본군을 공격하는 등 수십 차례 일본군과 싸우며 충북 의병의 피 튀는 대 항일전을 전개했다.
다음해인 1908년 4월 22일 의병 50명이 옥천군 안내면 답양리 가산사 인근 지경말 마을에서 보은 수비대와 교전하는 등 1910년 나라를 빼앗길 때까지 충북에서 1백 50여 회에 걸쳐 항일전이 계속되면서 한말 정미의병의 절정기를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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