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정유감2(山情有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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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정유감2(山情有感)
  • 김양순 수필가
  • 승인 2020.01.16 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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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양순 수필가

지난호에 이어서…

남의 눈높이에 맞춰야 하는 세상살이가 내겐 너무 버겁다.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찾을 수 없다. 그래서 나는 내 마음의 높이까지만 오르려 한다. 소박하지만 결코 남루하지 않은 삶, 안빈낙도를 꿈꾼다. 인생은 비단옷을 입고 밤길을 걷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남들 눈에는 잘 보이지 않는다. 비단옷을 입었는지 누더기를 걸쳤는지는 자신이 가장 잘 아는 법이다.
설자리 앉을 자리 가려가며 나를 다스릴 수 있으면 어설프게 갖춰 입은 비단옷도 부끄럽지 않을 것이다. 지혜가 부족해서 실수의 연속이었던 지난날들에 아쉬움이 많다. 그러나 그 속에서 얻어진 교훈도 있었을 테니 나름의 의미는 있다 하겠다. 흘러간 시간의 깊이를 반추하며 또 어디론가 흘러갈 미완의 여정을 준비한다.

대전 둘레길 여러 산성중에서 계족산성이 가장 유명하지만 나는 우리 동네 뒷산 갈현성을 자주 간다. 오천년 우리의 역사 중에서 가장 소외받는 백제의 전설이 깊이 잠들어있는 듯하다. 눈을 감고 귀를 모으면 호연지기를 꿈꾸었을 백제 장수의 함성과 그를 사모하는 아리따운 여인의 애달픈 노랫소리가 들릴 것만 같다. 깊이를 잴 수 없는 시간에 갇힌 옛 성 허물어진 돌 틈 사이에 다람쥐 한 쌍이 숨바꼭질 한다. 가을에 숨겨놓았던 도토리가 다 떨어졌는지 등산객이 버린 과일 껍질에 눈독을 들이는 것 같다. 작은 몸짓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한참을 바라보았다. 방해하지 않으려고 숨을 죽였는데도 나랑 눈이 마주쳤다. 쪼르르 도망가며 작은 돌탑의 돌멩이를 굴려 한낮의 적요를 깨운다. 해칠 생각은 전혀 없었는데…….

처서가 지나고 백로가 가까워진 여름 끝자락, 아직도 늦더위는 기승을 부린다. 그늘이 있기는 하나 한낮에 산을 오르는 것은 고행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습관처럼 되어버린 산행에 제법 재미가 붙었다. 그런 내가 대견하고 눈에 띄게 가벼워진 몸이 고맙다. 어제 오늘 그랬듯이 별일 없으면 내일도 등산화 끈을 당겨 매고 집을 나설 것이다.

재촉하지 않아도 어김없이 가고 오는 계절, 구름 한 점 없이 청명한 하늘이 오늘따라 더 높아 보이고, 영글어가 가는 밤송이도 제법 튼실해 보인다. 떡갈나무 잎새도 벌써 누른빛이 감돈다. 녹음 푸르던 숲이 붉은 옷으로 갈아입고, 그 고운 잎들은 또 소리 없이 지고, 여름 철새들이 날아가 버린 가을 깊은 날에도 나는 이곳을 찾을 것이다. 발밑에 수북한 낙엽을 밟으며 가을 산이 들려주는 소리에 귀를 기울일 것이다. 섭리에 따라 채워지고 비워지는 아름다운 자연, 하얗게 비워진 숲이 동면에 들어도 나목들은 초연하게 자리를 지킬 것이고 다람쥐도 산 꿩도 그곳에서 겨울을 날 것이다. 바람소리 황량한 겨울산을 오를 엄두는 안 나지만 함박눈 내리는 날 하얀 산이 손짓하면 그 유혹은 떨치기 어려울 것 같다.

우연히 겹치면 연연이라고 한다. 사람과의 인연이든 사물과의 인연이든 살면서 조우하는 많은 것들 중에서 옥석을 가려내는 일 또한 오롯이 자신의 몫이다. 다시 맞는 가을에는 내 안의 나를 성찰하며 더 나은 삶의 지평을 열어가야겠다.

우연히 들인 습관 하나가 긍정의 힘을 발휘하여 여름 한철 행복할 수 있었던 것처럼 또 어떤 우연이 미지의 세계로 나를 데려다 줄지 그 우연도 자못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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