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옥과 같은 식민지 백성의 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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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과 같은 식민지 백성의 설움
  • 임요준기자
  • 승인 2020.01.16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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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감옥과 같은 식민지 백성의 설움

식민지 젊은 시인은 지배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지배국의 언어로 나라 잃은 심경을 시로 표현했다. 비록 식민지였으나 그는 조국을 사랑했다. 그는 자신의 언어로 그 시를 개작했다가 또 다시 지배국 언어로 개작했다. 조국을 버릴 수도, 그렇다고 지배국의 백성으로 살기란 더 싫었던 그는 자신의 언어로 그의 이중적 심경을 담아 최종 개작을 한다. 정지용 시인의 ‘슬픈 인상화’는 그렇게 네 번의 개작과정을 거쳐 왔다.
김묘순 문학평론가는 이 같은 정 시인의 개작과정에서 같은 내용의 다른 표현들에 주목했다. 한국 근대시에서 처음 사용된 기호들과 언어외적 표현들에 눈독을 들인 것이다. 한국문학계에선 처음 있는 일이다. 그녀의 논문이 지난해 일본지용제에서 발표됐을 때 둘째가라면 섭섭할 대학교수들도 깜짝 놀랐다. 한국 근대시의 대전환을 가져온 정지용 시인과 그 내용을 밝혀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김 평론가의 논문 마지막 호를 시작한다.편집자 주

김 평론가는 “예술가는 그리는 선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리려는 선을 보기에 보이지 않는 선을 본다. 정지용도 의도하고자 하는 선 즉 기호에 의미를 담았다”며 ‘슬픈 印像畵’에 나타난 기호학의 미적 의미를 파고들었다. 그러면서 그녀는 시어의 띄어쓰기나 표기법 등에 의한 차이를 강조했다.
첫째, 한글의 “초성 + 중성 + 종성”에서 ‘종성’을 따로 떼어 표기하는 것이다. 이는 “수박 내ㅁ새 품어오는 → 수박냄새 품어 오는”과 “포풀아 - 늘어슨 큰기ㄹ로 → 길옆나무에 느러 슨” 그리고 “세메ㄴ트   → 세멘트 깐”과  “오레ㄴ지 → 오랑쥬”, “ㅂ질을 → 껍질”에 나타난다. 이는 1926년 學潮(학조)에 발표한 부분에서 발견되고 있다. 이는 정지용이 일본 유학시절에 사용하였을 일본어에 대한 흔적으로 보인다. 흔히 일본어에서는 한글에서 “받침”이라 이르는 “종성”을 잘 사용하지 않는다. 이후 ‘정지용 시집’에서는 종성을 사용하여 한글표기법에 맞추고 있다.

둘째, 시각적인 것과 주체의 마음전이로 인한 화자의 슬픔에 대한 강조용법이다. “먼-ㄴ 海岸  → 먼 海岸 쪽”에서 “먼-ㄴ”은 “머(언)”의 줄임말로 시각적으로 ‘멀다’라는 의미를 강조하기 위한 수단이다. “먼” 보다는 “먼-ㄴ”이 더욱 멀고 까마득해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일본에서 바라본 해안 쪽이 한국에 돌아와서 보게 되었을 해안보다 훨씬 멀어 보임직하다. 이는 조국을 잃은 가난한 유학생의 “전등”이라는 희망이 “흐늑이며 박어리는” 상황이다. 즉, “흐늑이며 박어리는” 의 주체는 “전등”이다. 이는 “침울”하게 울리는 “汽笛소리”나 “그”의 “失心한風景”과 맥을 같이 한다. “失心한風景”은 당시 조선인의 마음이었으며 화자인 지식인 정지용의 고뇌에 찬 슬픔이었을 것이다.

셋째, 단어나 어휘 등의 생략이나 줄어듦이다. “후주군 한 첫녀름의 저녁 → 첫녀름의 저녁 때………”, “먼-ㄴ 海岸  → 먼 海岸 쪽”, “포풀아 - 늘어슨 큰기ㄹ로 → 길옆나무에 느러 슨”, “헤엄처 나온 것 처름 / 흐늑이며 박어리는 구나. // → 헤염처 나온듯이 깜박어리고 빛나노나。 //”, “세메ㄴ트  → 세멘트 깐”, “오레ㄴ지 → 오랑쥬”, “ㅂ질을 → 껍질”, “슯흠이여니. → 시름……” 등에서 생략하거나 줄어들고 있다. 이는 “후주군 한”, “포풀아”, “電燈。 電燈。”, “흐늑이며”, “슯흠이여니.”에서 나타난다. 또 “먼-ㄴ 海岸  → 먼 海岸 쪽”,  “세메ㄴ트  → 세멘트 깐”, “오레ㄴ지 → 오랑쥬”에서 “ㄴ”이 생략된다. 이는 정지용이 시적어휘를 보다 간결하게 정리한 것으로 보인다.

슬픈 印像畵는 ‘종성’을 따로 떼어 표기하거나 시각적인 것과 주체의 마음전이로 인한 화자의 화법이 특이하게 산출되고 있다. 그리고 단어나 어휘 등의 생략이나 줄어듦으로 인해 시가 생산되고 있다. 이는 일제강점기에 일본에서 바라본 조선청년의 정서를 헤아려볼 수 있다.

당시 정지용의 마음은 ‘日本の蒲團は重い’(일본의 이불은 무겁다)에도 나타난다. 

정지용은 “어울리지 않는 기모노를 몸에 걸치고 서툰 일본어를 말하는 내가 참을 수 없이 쓸쓸하”다고 고백한다. “조선의 하늘은 언제나 쾌청하고 아름답고 조선 아이의 마음도 쾌활하고 아름다울 것이지만 걸핏하면 흐려”지는 정지용의 마음이 원망스럽단다. “추방민의 종이기 때문에 잡초처럼 꿋꿋함을 지니지 않으면 안”되는 정지용. “어느 곳에 심겨지더라도 아름다운 조선풍의 꽃을 피우지 않으면 안”되었던 그. 정지용은 “마음에는 필시 여러 가지 마음이 어우러져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심란한 그의 마음이 엿보이는 부분이다. “찢어진 창호지가 바늘 같은 차가운 바람에 휭휭 밤중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이불 깊숙이 파고들어 움츠러든다. ……일본의 이불은 무겁”단다. 정지용은 일본이 가하는 압력의 하중을 이불의 무게에 비유하며 무게중심을 이동하고 있다. 이는 식민지 지식인의 극심한 비애를 견디려는 일종의 노력으로 보인다. 이렇게 정지용의 민족적 고뇌 확산은 안으로 서늘히 굳어져 축소되어 이동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던가? 그리하여 이불로 파고들어 움츠러들었다.

김 평론가는 논문의 결론에서 “정지용은 시에 생명을 불어넣기 위해 기호들을 사용했다. 언어로 온전히 다 전하지 못하는 그의 마음. 그것은 정지용의 사고였고 기호적 문자의 지시였다”며 “정지용은 일본어와 조선어, 지배국과 피지배국 그리고 비유학생과 유학생이라는 대립구도를 설정하며 그의 이중적 감정의 교차를 경험하게 된다. 조선의 지식인이자 식민지인이었던 정지용과 그가 처한 상황은 일본이라는 피식민지인의 상황과 매우 대립되는 속성”이라고 했다. 

이어 “슬픈 印像畵를 발표할 당시 정지용은 이중적인 감정을 지닐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식민지인과 조선의 지식인이라는 대립구도 속에서 그는 이중적 감정의 교차와 얽힘을 수도 없이 마주하였을 것”이라며 “이 구도에서 분출한 정지용의 이중적 감정은 한군데 안주하지 않고 시의 언어를 끊임없이 개척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감정의 교차와 얽힘이라는 혼란스러움은 그의 시 개작과정에서 기호학적 시 창작으로 나타났다. 이렇게 정지용은 기호와 형식을 동원하여 시각적·의미적으로 식민지인·조선 지식인의 정서를 형상화하고 있었던 것”이라고 주장했다. 

끝으로 그녀는 이번 논문을 통해 “정지용의 대립구도와 감정 교차의 이해에 디딤돌이 되길 기대하며, 일본유학 시절 전반적인 작품의 대립구도와 감정 교차에 대한 보다 심층적인 연구가 되기를 바란다”고 기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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